초록

[한글]

뜻으로 본 한국역사 저술 70년 기념
한국에다가 진리를 살리려는 자는 먼저 한국을 알아야 할 것이요, 한국을 알려는 자는 먼저 한국의 역사를 알아야 할 것이다. 헤맴과 더듬이질에 지쳐 절망하려는 한국의 젊은이들 앞에 새 역사를 보여주라! 그가 거기서 새 세계관의 둥근 달을 찾아내는 순간 그의 가슴속에 벌써 희망의 빛을 반사하는 새 생명의 힘찬 밀물이 프로테스탄트의 부르짖음과 함께 올라와 있을 것이다


<저자소개>

1901. 3. 13. 평북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 출생.
1906. 덕일소학교 입학.
1914. 덕일소학교 졸업, 양시 공립 보통학교 편입.
1916. 양시 공립 보통학교 졸업 및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 입학.
1919. 3·1 운동에 참가하신 후 학업 중단.
1921. 오산학교 편입. 오산학교에서 이승훈·유영모 선생의 영향받으심.
1923. 오산학교 졸업.
1924. 4.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일부 입학.
1928. 3.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일부 졸업.
이때 우치무라 간조 선생의 성서연구 집회에 참여.
1928. 귀국하시어 모교 오산학교에서 교편 잡으심.
1934~35. 동인지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쓰시기 시작.
1938. 3. 창씨개명과 일본어 수업을 거부하시고 오산학교를 사임당하심.
이후 2년간 오산에서 과수원을 돌보시며 학생을 상대로 전도하심.
1940. 3. 평양 송산에 있는 송산농사학원을 김혁 선생으로부터 인수.
1940. 8. 동경에서 계우회(鷄友會) 사건으로 평양 대동경찰서에 1년간 구치.
1940. 11. 아버님 함형택씨 별세.
1942. 5. 서울에서 ‘성서조선 사건’이 일어나 미결수로 1년간 복역.
1943. 3. 불기소로 출감, 농사에 종사.
1945. 8. 15. 해방을 맞아 고향에서 용암포 자치위원장, 용산군 자치위원장이 되심.
1945. 9. 평안북도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에 취임.
1945. 11. 23. 신의주 학생사건의 책임자로 소련군 사령부에 체포, 구금. 이 50일 동안 감방에서 시 「쉰날」을 쓰심.
1946. 1. 석방되시어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
1946. 12. 24. 다시 피검되시어 1개월간 옥고를 치르심.
1947. 2. 26. 월남. 이때부터 수염을 깎지 않으셨다고 함.
1947. 3. 17. 서울에 도착, 매주일 YMCA 강당에서 일요종교집회를 가지심.
1950. 6. 6·25가 발발하여 피난차 남하하심.
1950. 7.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시면서 『수평선 너머』를 발간하시고 성경연구종교집회를 계속하심.
1953. 겨울에 서울로 올라오심.
1956.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사택을 마련, 이때부터 『사상계』 집필 시작.
1958. 8. 『사상계』에 투고하신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20일간 구금.
1961. 7. 5·16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5·16을 어떻게 볼까?」를 발표.
1962. 2.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3개월간 미국여행 및 10개월간 퀘이커 학교에서 공부. 이어서 영국, 네덜란드, 독일 등 3개국 시찰.
1963. 6. 23. 한국에서 사실상의 군정연장인 민정이양극이 이루어진다는 소식에 격분하여 인도, 아프리카 등의 여행을 중지하고 귀국하시어 강연하심.
월남언론상 타심.
1970. 4. 19. 잡지 『씨알의 소리』 창간호 내심.
1970. 5. 29. 『씨알의 소리』 2호가 나온 후 정부가 인가취소통고를 하자 소송 제기.
1971. 7. 6. 『씨알의 소리』 대법원 판결에서 승소, 다시 나오게 됨.
1971. 7. 젠센기념관에서 노자 강의 시작, 1988년 5월까지 계속하심.
1971. 8. 삼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하시는 한편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조직하여 대표위원으로 1975년까지 활동.
1971. 11. 13. 전태일 1주기 추도회 및 강연회를 시작으로 씨알의 소리사 주최로
1975년까지 해마다 계속하심.
1971. 12. 2. 고희 축하모임 및 강연회에 참석. 월1회 부산모임에 참석하셔서
1988년 5월까지 계속하심.
1973. 11. 25. 주일 오후 성서강좌를 개설, 1978년까지 계속하심.
1974. 11. 윤보선·김대중과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만드시고 대표위원이 되심.
1978. 5. 사모님 황덕순 여사 별세.
1976. 3. 1. 3·1민주구국선언에 참여.
1977. 3. 22.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받으심. 그후 형집행정지와 1980년 복권.
1979. 퀘이커 세계협회 초청으로 미국 종교대회 참석.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
1979. 11. 23. 명동 YWCA사건으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15일간 구속.
1981. 8년간 모교인 오산학교의 동창회장으로 추대.
1983. 6. 단식을 시작하시어 민주화운동에 영향을 주심.
1984. 11. 남강문화재단 설립.
1985. 퀘이커세계협회 멕시코 종교대회에 참석. 두번째로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 미국, 캐나다 등지를 순회하시며 평화와 민주화를 외치심.
1987. 7. 13. 서울대학병원에서 대수술을 받으셨으나 기적처럼 다시 일어나 강연, 강의, 토론, 회견 등 맹활약을 하시며, 『씨알의 소리』 복간에 힘쓰심.
1987. 10. 12. 동아일보사 제정 제1회 인촌상 수상.
상금 전액을 남강문화재단 기금으로 기탁.
1988. 8. 암이 재발하여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심.
1988. 9. 12. 제24회 서울올림픽평화대회 위원장으로서 서울평화선언 제창, 채택됨.
1988. 12. 10. 폐간 8년 만에 『씨알의 소리』 복간호가 나옴.
1989. 2. 4 여든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뜨심.




[영문]